책을 말하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는 사회가 됐다. 예전에는 당연히 고통이고 괴로움이었던 일의 영역에서조차 요즘 세대들은 재미를 말한다. 심지어 열악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꿈을 쫓으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기야 나 역시 그러한 방향에 일조하는 일을 하고 나 역시 꿈을 쫓는 삶이 더 아름답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에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열정에 기반한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하나의 지독한, 새로운 경향의 착취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생각을 오늘날 젊은이들이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각 분야의 청춘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하며 실체를 밝혀 나간다. 그 잔혹하고 강고하고, 도무지 어찌해 보기 힘든 현실을 말이다.
열정만으론 성공이 담보될 수 없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오래도록 해온 얘기다. 그러나 그러한 꿈의 열정이 좌절되었을 때 나를 포함해 많은 이들은 그 부작용을 고스란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돌려왔다. 그러나 이 책은 정면으로 묻는다. 과연 그것이 그들만의 책임이냐고? 혹시 우리의 무관심이,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 곁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을 무시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 일부 지나치게 냉정하게 쏠리는 느낌도 있지만, 대놓고 부정하기에는 또 우리의 현실이 너무 만만치 않음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하나의 편향된 시각이 아닌, 사회를 바라보는 분명한 또 다른 시각이 보완적 필요성을 인정한다면 충분히 음미해 보고 논의될 만한 책이다. 좋은 책인데...조금은 불편할 이 책이 대중들에겐 또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기억에 남다>
- 오늘날 열정의 대상으로 허락되는 것은 더 이상 세계나 사회, 혹은 타인이 아니다. 오직 나 자신뿐이다. 그래서 심화되는 ‘자기 혹사’의 몸짓들은 ‘치열하게 살지만 타인에게는 관심이 없는’ 개인들을 양산한다.(p.25)
- 청년들에게 ‘꿈을 펼쳐라’는 광고를 하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꿈을 못 펼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젊음의 5기(용기, 패기, 혈기, 호기, 끈기, 즉 개인의 의지)’를 말하는 것은 국가가 실업의 문제를 청년 개인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하지만 실업문제가 과연 ‘청년 각자의 의지’가 부족해서 생긴 것일까?(p.28)
- 우리는 이 광고(모 공익광고)를 통해 ‘꿈’이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 시대의 사용법을 알 수 있다. 이 광고에서 말하는 ‘꿈’은 결국 ‘일을 하는 것’, ‘직업을 갖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꿈’을 그런 것으로 정의하지 않았다.(중략) 지난 시대의 ‘몽상가(말 그대로 이상을 꿈꾸었던)’들이 현대를 방문한다면 ‘꿈’이라는 말이 이토록 많이 쓰여지고 있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어느 때보다 초라한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꿈’이다.(p.29)
- 왜 ‘꿈’의 자리에 ‘기업의 이름’이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은지, 왜 ‘열정’이라는 말을 ‘스펙 쌓기’로 대체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지, 왜 ‘미치는’ 방법에 대한 실용서들이 이토록 범람을 하고 있는지...(p.33)
- 기업가는 스스로 ‘혁신적 기업가’로 진화하지 않는다. 노동자에게 ‘혁신적 노동자’가 될 것을 요구할 뿐이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너는 ‘해야 만’ 하니까!”
기업은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신이 자본가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에게 고용되지 못할 것이다. 구직자들은 제각기 특별한 존재임을 주장해야 한다. 말하자면 ‘영웅’이나 ‘초인’이 되어야 한다. ‘평범한 노동자’로 살기 위해 ‘비범한 존재 방식’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자본주의가 새롭게 발견한 열정의 ‘쓸모’이다.(p.34~35)
- 좋은 일자리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지원하는 사람들의 수는 그것의 수십에서 수백 배에 달한다. 물론 ‘눈높이를 낮추면’ 이런 실패를 겪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직업 교육이 아니라 대학 교육을 받는다. 비용 대비 산출을 생각해 볼 때 ‘그럴듯한’ 일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밑지는’ 장사이다.(p.39)
- 압박면접은 지원자의 약점을 파고들어 발언의 진위를 검증하고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자질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정보국이 첩보원을 선발하기 위해 만든 방식이다.(p.41)
- 적응력과 협동심에 가장 큰 배점이 주어진 것을 보면 ‘인성을 채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는다’는 기업들의 설명이 빈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때의 ‘인성’은 직장생활을 무난하게 하고 조직에 헌신하는 미덕을 뜻한다. 재벌 기업의 면접에서 “큰 기업도 상속세를 내고 합법적으로 상속되어야 한다”고 대답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일컫는 말은 아니다.(p.44)
- 열정은 제도화되었다. 체제는 열정의 분출을 요구하는 다양한 장치를 만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열정을 ‘유사도덕’으로 만들어 내는 일에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인센티브’제도이다.(중략) 자본은 인센티브를 통해 생산성 증대, 상벌체계의 재정비, 노동 동기부여라는 세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그러나 실적을 놓고 다른 직원들과 기묘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노동자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았다)(p.46)
- 자부심 없는 사람이나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부르고 노조를 만든다(이명박 대선후보, 서울 파이낸스 포럼 초청강연, 2007년 5월)(중략) ‘노동자’라는 단어는 일종의 불명예가 되었다. 이 사회의 노동자 수는 결코 줄지 않았지만, 자신이 노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이제 노동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새로 등장한 ‘자기계발 담론’들은 그들의 눈을 가려 현실을 직시하지 않게 만들어 준다.(p.49~50)
- 오늘날 ‘잉여’란 말은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해 낸 ‘잉여 가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 필요로 하지 않는 노동력을, 즉 일시적인 실업이 아니라 영원히 고용될 수 없는 이들을 의미한다. 가치를 생산하는 건 노동이 아니라 자본이다(혹은 이미 고용된 노동이다).(p.53)
- 프로 게이머의 연봉은 1군의 경우, 적으면 500만원, 평균적으로 1000~2000만 원으로 알려져 있다(물론 각자 받는 금액은 비밀에 부쳐진다). 대기업 팀을 제외하면 2군 연습생에게는 아예 연봉이 없다. 2군은 숙식을 제공받을 뿐 계약서는커녕 간단한 서약서도 없이 훈련한다. 1군 선수들도 근로계약서가 아닌 민사계약서를 쓰고 게임에 임한다. 프로 게이머들은 프로리그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 1년 365일 24시간 합숙한다. 일주일 경기가 끝날 때마다 하루 반 정도의 휴식이 주어질 뿐이다. 참고로 일년 중 리그가 없는 기간은 단 한 달에 불과하다.(중략) 게임단 내의 경쟁은 매우 치열하며 이들은 코치의 감시 속에서 하루 12~16시간 게임을 한다.(p.65)
- 한국에서 운동선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는 청소년은 14만 명 정도가 된다. 이중에서 자신의 운동을 통해 대학에 가는 비율은 10%, 대학에서 사회로 진출하는 비율은 또 10%이다. 즉, 운동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직업 운동선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고작 1%라는 말이다. 생활 체육이 보편화되어 있는 나라 같으면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이 학업이나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 운동을 하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운동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운동의 길을 선택하는 순간, 대다수가 운동 외의 자기 계발을 전부 포기한다(p.70)
- "어차피 그 녀석들, 그런 거라도 안 하면 대학도 못 가고 먹고 살기도 힘든 애들 아니야?“ 프로 게이머, 운동선수, 연예인 지망생의 ‘착취’에 대해 말하면, 인터넷 상에서 가장 흔한 반응이다. 우리는 이 반응에서 하나의 진실을 발견한다. 한국 사회는 ‘대학을 못 가는’ 사람들은 외국인 차별하듯이 강하게 배제한다. 그래서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은 약간의 확률만 있다면 게임, 운동, 연예 활동에 자신의 모든 열정을 내던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착취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세계의 경쟁 구조에 편입되고자 노력한다.(p.74)
- 철수와 승희가 나온 중앙대 영화학과의 경우 매년 4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하는데, 이중 영상을 다루게 되는 사람은 5명도 안 된다고 승희는 잘라 말했다. 기껏해야 1명에서 3명 정도가 고작이라고 한다. 철수는 동기 중에서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과 방송사에 기술직으로 들어간 사람이 7~8명뿐이었다고 말했다. 그나마 그의 기수는 성공한 편이라고 한다.(p.77)
- 전국 대학의 영화학과 정원을 다 합하면 2~3만 명 정도 된다. 반면 한국에서 한 해에 만들어지는 장편 영화는 60편이 채 안 된다. 영화 한 편당 필요한 스태프의 숫자는 100~120명 정도이다. 두세 탕 뛰는 사람이 많으니 일하는 사람의 숫자는 1년에 1000명이 안 된다. 더구나 디지털 기술이 도입되면서, 영화 한 편을 찍는데 필요한 사람 숫자는 더 줄어들었다. 최대한 줄이면, 영화 한 편당 10명으로도 가능하다. 소위 디지털 혁명 때문이다.(p.81)
- 영상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영화 지망생’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중략) “이거 실화예요. 회사 분위기 안 좋고, 펀딩 안 되고, 뭐 그런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가방 하나 맨 애가 문을 열더니 사무실에 들어왔어요.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영화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돈은 안 주셔도 괜찮습니다!’라고 외치더라고요. 근데 현실은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거든요. 사람들은 그런 일에 감동받지 않아요. 그 애를 쳐다보는 스태프들의 심경은 ‘저런 녀석들 때문에 내가 돈도 못 받고...’였죠. 영화판에 애들은 자꾸 들어와요. 정작 끝까지 가는 사람은 없는데 계속 유입이 돼요.”(p.83)
- IT회사는 피라미드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요. 회사는 팀장급 이상이 아니면 자기 회사의 인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만 자기네 사람으로 봅니다. 그 밑으로는 그냥 단순 인력으로 생각하죠. 결국 팀장들하고만 대화하고, 그들에게 아랫사람 관리를 시키고, 그 밑으로는 마음에 안 들면 갈아버립니다. 그 악순환 속에서 피라미드 구조를 조율하는 팀장만 대우받습니다. 나머지는 전혀 보호받지 못해요.(소규모 IT회사 대표의 말. p.99)
- 코딩이 좋아서, 프로그래밍이 짜릿해서 IT업계에 뛰어든 개발자에게 회사가 요구하는 것도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감내해라’이다. 개발자들이 자신들은 노동자가 이야기하는 것도 이런 기제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에 따르면 IT업계에서는 노조에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사람은 많아도 자신이 노동자임을 인정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공장의 생산 기술자가 노동자이지 자기 같은 전문가가 왜 노동자냐는 논리 때문이다.(p.103)
-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가 개발자의 전성기이며 30대 중반만 넘으면 미래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중략) “개발자 10명 중 관리자가 되는 사람은 한 명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 놓인 개발자들에게 ‘경영자 마인드’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면 결국엔 ‘잘난 놈만 살아남으란’ 얘기 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의 개발자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시장의 크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들 모두가 사장이나 대기업 관리자가 될 수는 없다.(p.104)
- 우리가 인터뷰했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기술’은 그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예전의 장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달라진 점은 훨씬 불안정해진 노동 환경이다. 이들은 그 변화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 (자본과 다르게) 노동은 유연하게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무슨 상황이 닥쳐오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다.(p.136)
- '창업경진대회‘는 더더욱 진짜 창업을 하려는 친구들이 아니라 창업대회 수상을 취업 스펙으로 확보하려는 이들의 경쟁공간이 된다. 그리고 그런 경쟁이 치열할수록 그들의 노동과 아이디어는 기존의 기업에게 용이하게 흡수된다. 그렇게 착취는 착취대로 하면서도, 사회는 점점 더 기업의 ’고용부담‘을 줄이기 위해 청년들이 취업에 나서지 말고 창업의 대열에 뛰어들 것을 요구한다.(p.140)
- 사업에 실패하면 ‘금융사범’이 되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청년들이 다 창업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실정에서 국가와 대학이 권하는 ‘1인 창조 기업’이란 발상이 실패의 책임을 1인에게 떠넘기는 것 외의 어떤 실효성이 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전후 사정을 살피면 ‘1인 창조 기업’을 강조하는 것은 귀가 얇은 청년 실업자들을 자극해 실업률 숫자만 낮추면서 창업 알선 브로커의 수익창출 기회를 유지하는 일종의 ‘폭탄 돌리기’로 보일 뿐이다.(아이뉴스 24, 2010년 12월 26일 강호성 기자가 쓴 글에서 안철수 교수의 말: “한 사람이 창업하면 실패 확률이 아주 높아요. 두 사람 이상(2~4명) 공동 창업할 때 두 배 이상 성공확률이 올라간다는 것은 통계로 이미 검증된 겁니다. 1인 창조 기업을 왜 주장하는지 모르겠어요”)(p.142)
- 진보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의 상근자들에게는 임금의 하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형편이 좋지 않은 단체 같은 경우, 월 20만 원을 주는 곳도 있다. 그나마 ‘진보신당’에는 나이와 자녀에 따른 수당과 호봉 시스템 등의 임금 체계가 존재한다. 상근자에게는 근로계약서도 쓰게 하고 4대 보험 가입도 시킨다. 월급도 150만 원 정도이다. 그래서 운동권들끼리는 농담으로 진보신당 상근자를 ‘운동권의 대기업 정규직’으로 부른다.(p.150)
- 90년대에는 이렇게 온갖 문화적 실험과 시도들이 시작되었다. 이는 민주화와 경제 성장이라는 ‘절대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된 뒤 ‘새로운 무언가’를 찾는 과정이었으며, 집단에 매몰되어 있던 개인성을 ‘문화’를 통해 구조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중략) 90년대의 변화들은 각종 대중문화와 IT기술에 익숙한 청소년들의 수를 급격히 증가시켰다. 새로운 대중문화 콘텐츠와 함께 사춘기를 보낸 이들, 컴퓨터와 밤새 씨름하며 자라난 아이들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진로’에 눈을 떴다. 돈과 명예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쫓는 아이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다.(p.167~169)
- 98년과 99년에 걸쳐 교육부 장관으로 재직한 이해찬 전 총리는 “하나만 잘해도 대학 간다”는 유명한 발언을 통해 ‘이해찬 세대’의 등장을 알렸다. 특정 분야에 재질을 갖춘 수험생들을 위한 전형이 속속 만들어졌고, 애니메이션 학과, 게임 학과, 영화과 등의 전문적인 주제를 다루는 학과들이 여러 대학에서 생겨났다.(p.170)
- 벤처 외에도 방송, 영화, 연예 기획 등의 분야에 뛰어든 청년들도 어려움을 겪었다. 노동 강도는 높았고, 처우는 형편없었다. 게다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이 날림으로 설립한 회사들이 넘쳐났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회의를 품었으나 그들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이 한마디뿐이었다. “네가 좋아해서 선택한 일이니까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이렇게 ‘일이 더 이상 고난이 아니라 기쁨인’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그들의 이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많은 이들이 비싼 값을 치르고 깨달음을 얻었다.(p.179)
- 자기계발담론의 범람은 이런 추세와 맞닿아 있다. 당신은 지금 마시멜로를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달콤한 위로,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면 언젠가는 얻을 수 있다는 조언, 그것들의 진짜 의미는 사실 ‘그러니까 혼자 알아서 하세요’라는 냉정한 외면이다. 매년 새로 생기는 식당의 70%가 1년 안에 망한다는 통계 자료나 (덤프 노동자들처럼) 사장이 되었더니 오히려 더 가난해지더라는 사실은 철저하게 외면당한다.(p.185~186)
- 열정노동의 본질은 다음의 세 가지 진술이다.
1)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이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2) 그러므로 나는 (생계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다
3) 고로 나에겐 노동자의 권리가 필요 없다
열정노동의 확산은 IMF 사태라는 국내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창궐이라는 전 세계의 상황을 근간으로 한다(p.186)
- 오늘날의 자본을 지탱하는 부동산들, 현금과 유가증권들, 생산 설비들, 지적 재산권들, 그리고 제도와 권력들은 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굳건함을 선포한다. 변할 수 있는 것도,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없으며 남은 것은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자기 혁신밖에 없다고 말한다. 거기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 주변인이 되는 것밖에 없다.(p.192)
- 너희들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잖아.(한 노동운동가가 영화인에게 했다는 말)
‘노동시간 동안 고통을 감내하므로 화폐라는 쾌락의 도구를 통해 보상받는 것이 노동자이다. 그런데 업무 시간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가 아니다.’ 이 발언은 이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정당한 몫을 요구하기 위해, 그들이 겪는 노동이 고통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했다. 이것은 교환의 법칙을 위반하는 자본가에 대한 고발임과 동시에 고통 받는 노동자를 숭고한 존재로 만드는 도덕적인 투쟁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일 자체에서 쾌락을 얻는다는 사실은 기존의 노동 운동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태도를 쉽게 무시하기는 어렵다.(p.194~195)
- 오늘날 한국의 노동 인구는 2300만 명 정도인데, 1/3의 정규직 노동자, 1/3의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1/3의 자영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p.196)
- 2010년 8월 통계청이 밝힌 바에 따르면 비임금 근로자 규모는 696만 명 정도다. 고용원이 있는 고용주가 148만 명,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가 415만 명, 무급 가족 종사자 133만 명이다. 임금근로자 중에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격차가 심하듯, 비임금 근로자 중에선 고용주와 자영업자의 소득 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의 ‘한국 노동 패널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농업 외 산업의 자영업자 중 적자를 보고 있거나 실질소득 100만 원 이하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50% 가량이었다.(최효미, 자영업자의 근로소득 분석) 그렇다면 적어도 200만 가량의 자영업자들이 중위 임금 2/3이하인 저임금 계층과 비슷한 사정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덧붙여 무급 가족종사자 133만 명의 사정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다. 450만 명의 저임금 노동자와 그와 비슷한 생활수준을 지닌 330만 명의 자영업자가 있다. 단순하게 계산해 보아도 저소득층으로 분류될 인구가 800만 명에 육박하는 것이다.(p.198)
- 1997년 IMF 사태 이후 ‘노동자와 시민의 분리’는 더욱 급속도로 진행되었다.(중략) 김대중 정부 때 구속된 노동자는 김영삼 정부보다 많았고, 노무현 정부 때 자살한 노동자 역시 그 이전보다 많았다. 이른바 민주 정보 10년에 대한 평가논쟁에서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부분도 바로 노동 분야다. 노동자에게는 정말 힘겨운 시기였기 때문이다.(p.206~207)
- 법원에서는 ‘정리해고나 사업 조직의 통폐합, 공기업의 민영화 등 기업의 구조 조정의 실시여부’에 반대하는 파업은 원칙적으로 경영권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판결(대법원 99도5380 판결, 2002년 2월 26일)했다. 노동조합이 이런 문제를 협상의 대상으로 삼을 권리가 없다고 선언한 셈이다. 노조가 자발적 임금 삭감 등의 양보 교섭을 통해 얻어낸 고용 안정 협약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무력화되었다. 대우차 사태에 대한 법원의 판단(서울고법 2002나58138 판결, 2003년 7월 10일)은 이 점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 판결에선 ‘노사가 향후 5년 동안 정리해고를 하지 않기로 한다’는 명문 합의의 효력마저 부정되었고, 오히려 이 합의를 관철하기 위한 파업이 불법적인 행동으로 간주되었다.(p.209)
- 노동자를 일종의 숨겨야할 신분으로 인지하던 전근대적 사회의식은 생산관계에서 노동자의 역할을 지우려는 신자유주의의 교리를 만나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이제 유물론의 차원에서도 헤게모니의 차원에서도 노동은 무력한 단어가 되었다.(p.218)
- 이러한 소비자 운동이 윤리적인 자기 검열의 차원을 넘어 조금이라도 실천적인 함의를 지니려면 우리가 불매 운동을 하는 ‘그 자본가들’과는 조금이라도 다른 ‘윤리적 자본가’의 존재가 요구된다. 말하자면 삼성전자 제품을 사지 않으면 LG의 물건을 사야 하는데 이때 LG가 더 괜찮은 기업이란 점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p.219)
- 사회적 기업의 설립은 선진국에서 계속 시도되는 중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그것이 얼마나 가능할지는 미지수이다.(중략) 사회적 기업의 대다수는 부자들의 자선기금을 기반으로 하거나, 정부에서 담당하던 사회 서비스를 민간에서 담당하는 것들이다. 자선도 복지도 뿌리내리지 못한 한국에서는 설립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사회적 기업’ 담론은 청년 실업 해소를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정부와 기존 시민 단체를 ‘사회적 기업’으로 탈바꿈시켜 보조금을 타려는 시민 단체가 만든 거품 현상에 불과하다.(p.223~224)
- 결국 문제의 핵심은 ‘열정의 반복’이다. 열정의 착취로 인해 생긴 이 순환을 끊어 내기 위해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열정을 불러와야 한다. 운동이 파편화된 시대에 활동가들은 새롭게 노동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고, 새로운 친구들은 자신들의 삶에 도움을 주는 운동의 역할을 찾지 못했다. 이들이 서로에게 도움을 주려면 여전히 열정이 필요하며 사라져 가는 열정이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는 열정노동을 만드는 구조를 비판한다. 하지만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는 따르려 한다. 여기에 우리의 모순이, 혹은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존재할 것이다.(p.236)
- 한국이 OECD 국가 중 가장 자살률이 높은 국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기준으로 인구 10만 명 당 25명이라는 수치도 보도되고, 청년층의 사망 원인 1위가 교통사고가 아니라 자살이 되었다는 개탄도 끊임없다. 그러나 한국의 자살률을 끌어올리는 압도적인 연령층이 노년층이란 사실은 잘 얘기되지 않는다. 정년퇴임 연령 이후의 연령층들, 55세에서 64세, 65세에서 74세, 그리고 75세 이상의 세 연령층에서 한국의 자살률은 압도적이다. 75세 이상의 경우 인구 10만 명 당 무려 160.4명이 자살하며 이는 OECD에서 2위인 헝가리의 36.1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치이다. 55세에서 64세 연령층의 자살률은 42.7명으로, 이는 2008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어 전쟁을 수행 중인 현역 미군 전사율과 자살률을 합한 숫자(39명 정도로 추산됨) 보다도 우위이다. 한국에서 노년을 보낸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볼 때 미군이 되어 전쟁을 수행하는 것보다도 힘든 과업이다.(p.243)
- 오늘날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상황은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왜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부자가 될 수 없는가? 이런 질문이 이어질수록 열정은 갑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나간다. 그러니까 열심히 일하는 것만은 안 되고, 창조적이어야 하고, 역량을 가져야 하고,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말아야 하고, 도전 정신이 있어야 하고, 문제가 생겨도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하고, 무언가에 미쳐야 하고... 이 중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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